전상인 서울대 교수·사회학

민주당이 또다시 장외투쟁에 나섰다. 종종 있는 일이긴 하나 손학규 대표의 각오는 자못 비장하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출정의 변(辯)인데, 이는 에릭 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의 마지막 구절이다. 한나라당 출신 당대표가 좌파 역사학자이자 영국 공산당 당원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점이 흥미롭긴 해도 이것이 민주당의 현주소다.

정당은 '권력의 집'이다. 국가권력을 주고받는 일은 정당의 본질적 존재 이유로서, 민주당이 오매불망 정권탈환에 부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민주당은 정권을 잡은 일도, 놓친 적도 없다. 지금의 민주당이 통합민주당으로 창당한 것은 2008년 2월이었고, 몇 달 뒤 민주당으로 개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당이 신생 정당이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민주당에는 오랜 전사(前史)가 있다. 신한민주당·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새천년민주당·통합민주당 등은 모두 민주당의 전신이다. 간판이 지금처럼 그냥 민주당인 경우도 몇 번 있었다. 한국 정당사는 이들을 '민주당계 정당'으로 분류하며 그 주류는 1945년에 출범한 한민당과 1955년에 발족한 민주당이다. 하지만 현재 민주당의 정강과 강령에는 자신의 과거 족보가 흐릿하다. 딴에는 그게 정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면서 민주주의 발전에 특히 헌신했던 민주당계 적통(嫡統) 정당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계 정당의 사실상 실종은 1990년 김영삼의 3당 합당에서 시작되었다. 1997년 김대중·김종필 사이의 이른바 DJP연합도 이에 가세했다. 전자는 12·12 신군부, 후자는 5·16 군부 잔재와의 정치적 합작이었다. 비록 개인적으로 양김(兩金) 다 대통령의 꿈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정통 민주당계에 대한 자기파괴나 자기부정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민주당계 정당은 자력(自力)으로 대권을 쟁취한 경험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생도 민주당의 승리가 아니라 노사모의 개가였다.

작금의 민주당이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이처럼 민주당계 정당의 계보학에서 일탈한 이후다. 지역적 기반이 위축되고 이념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은 명가(名家) 민주당의 전통이 아니다. 침묵하는 다수를 멀리한 채 시끄러운 소수에 끌려 다니는 양상 또한 원조 민주당과 거리가 멀다. 그 결과 오늘날 민주당에는 자체 동력이라 할 것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외부세력의 견인력이나 여야 충돌을 통한 반발력에 겨우 의존하는 모습이다. 민주당이 폭력국회나 장외투쟁에 친숙해진 것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

물론 반대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민주당 나름대로 국익을 보는 관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주민 대부분이 원하는 데다가 사법부도 적법하다고 판단한 4대강 사업, 그리고 당사자인 자동차업계가 환영한다는 한·미 FTA를 민주당이 '절대 반대'로 임하는 자세는 공당(公黨)의 몫이 아니다. 북한천안함이나 연평도 공격에 대해서도 민주당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분노했어야 옳다. 햇볕정책의 주역이 강경한 태도를 취했더라면 북한 길들이기에도 효과적일 뿐 아니라 햇볕정책 자체의 명예도 얼마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진보 콤플렉스를 끝내 벗지 못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민주당의 입장과 처신이 현실정치에서 실효성이 없다는 점이다. 가령 4대강 사업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고, 여당 단독 날치기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새해 예산안 역시 거의 무사통과해 버렸다. 무조건 반대, 물리력 행사, 그리고 장외로의 진군은 단지 외형상의 치열함일 뿐, 결과적으로는 정부·여당의 일방통행에 빌미를 제공하거나 그것을 방치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임전무퇴'가 무색하게도 민주당 자신의 지지율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한나라당의 저능(低能)과 무능으로 말하자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한나라당에조차 늘 밀리고 당하는 것이 현재의 민주당이다. 반세기가 넘는 민주당계 정당의 후예로서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민주당이라는 당명을 단념하는 것이 선대(先代)에 대한 도리인지 모른다. 손 대표의 말처럼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민주당 방식이 최상이나 최선이라는 보장은 없다.